《음악은 나의 첫사랑이였소.···》

《음악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미래를 락관하게 하지. 심장에서 나와서 심장으로 들어가는게 음악이라고 했소. 때문에 심장의 연소이고 마음의 정화인 음악을 잘 아는게 중요하오.》

 

《내가 음악예술론에서도 밝혔지만 우리의 음악은 새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을 반영하고 철저히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새형의 음악이요. 사람이 사상과 지식만으로는 살수 없소. 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해나가자면 풍부한 정서도 가져야 하오.

건전하고 풍부한 정서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사람의 감정을 고상하게 하며 정신과 도덕을 깨끗하게 해주오. 사람이 정서가 풍부해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고 인생의 고귀함을 알게 되며 그렇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되는거요. 그래서 나는 지난 기간 첨예한 군사작전적문제들을 비롯해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음악과 함께 풀고 가장 큰 기쁨도 음악에 담아 느꼈으며 가장 괴로운 슬픔도 음악으로 씻어버렸소.》

 

《음악은 나의 첫사랑이였소.···》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길동무이며 혁명과 건설의 위력한 무기요. 이것이 나의 음악관이라고 할수 있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으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였고 음악을 벗으로 삼으면서 집을 떠나 늘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는 수령님을 기다렸소. 그러다나니 음악은 내 인생에서 한 부분이 되였소. 동무들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인간의 심정을 다는 체험하지 못했을거요.

 

고급중학교시절엔가 명곡이 하나 생겼길래 혼자 듣기 아까와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지만 한 학우를 전화로 찾아 함께 감상한적도 있었소. 다음날 곡이 어떤가고 물어보니 자기는 잠결에 전화를 받다가 자장가처럼 들리기에 그냥 잠들었다는거요. 너무 아쉬워서 다시 집에 가서 들려주었댔지.》

 

《정치란 구호나 호소만으로 해결되는게 아니요.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강력한 측면만 강조할것이 아니라 정서가 있고 감정이 있으며 고상한 인간애가 있는 음악으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오. 한마디로 음악의 정치화가 실현되여야 사상과 정의 결합이 이루어질수 있는거요.》

 

《내가 지난 시기 문학을 인간학이라고 하였는데 노래도 인간학이라고 할수 있소. 문학을 인간학이라고 하는것은 그것이 산 인간을 그리고 인간에게 복무하기때문이요.》

 

《노래 역시 산 인간과 그의 생활을 반영하며 사람들을 혁명투쟁에로 불러일으킵니다. 문학이 인간의 사상감정을 이야기로 묘사한다면 노래는 인간의 사상감정을 가사와 곡에 담아 감정정서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래도 인간학이라고 말할수 있소.》

《인간생활을 떠난 노래는 진정한 의미에서 노래라고 말할수 없소.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생활을 떠난 순수한 자연, 순수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것은 말그대로 예술지상주의요.

우리는 자연을 노래하여도 그 자연속에 사는 인간의 참된 생활과 투쟁을 노래하여야 하오.

 

《노래를 인간학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표현하면 음악도 인간학이라는것입니다.

음악이 인간학이라는 사상은 음악이 인간의 사상감정과 요구, 지향과 념원을 깊이있게 반영하고 인간생활을 폭넓게 담음으로써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참답게 복무하여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총서 불멸의 향도 군가뢰성 32 중에서 김정일동지의 대사부분 발췌

 


《음악이라는것은 천연으로 생겼으나 사람에게 매여있고 아무것도 없는데서 생겨나 제절로 이루어지는것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껴 혈맥을 고동치게 하며 정신을 류동하게 하는것이다. 느끼는바가 같지 않으면 나는 소리도 같지 않아 기쁨을 마음에 느끼면 소리가 급해지며 즐거움을 느끼면 소리가 늘어지는것이다. 그 소리의 같지 않음을 잘 모두어 그 통일을 가지게 하는것은 웃사람의 지도여하에 있으니 지도하는바의 옳고그름에 따라 사회의 륭성과 침체가 달려있다.···》

악학궤범의 서문

 

《···우리 음악사에서 과학적인 음률체계가 실질적으로 구비된 때가 세종시기였소. 조선봉건왕조의 4대왕인 세종이 례의와 음악에 의거한 정치를 내세우면서 궁중음악의 정비와 강화에 힘을 넣었는데 그때 어명을 받고 과학적인 음률체계를 세운 음악가가 악성으로 불리운 박연이였지.

동무도 알겠지만 악성이란 후세가 음악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력사적인 평가이고 명예인데 박연은 몇 안되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소.》

량반가정에서 태여난 박연은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외조부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20살이 지나서부터 례의와 음악에 관한 옛 서적들을 널리 연구하였다. 하여 그는 자기 식의 정치리념을 세우려고 애쓰던 세종의 눈에 들게 되였다.

그 시기 세종은 박연에게 예로부터 음악을 제정하는것이 가장 어려운 일로 되여있는바 우에 있는 사람이 하고저 하는것을 아래사람이 듣지 않고 아래사람이 하고저 하는것을 웃사람이 듣지 않으며 우, 아래사람이 모두 하고저 하는것은 객관적조건이 불리하였는데 지금은 국가가 태평무사하니 그더러 마음껏 일하라고 권고했다.

하여 박연은 선행리론에 근거하여 한쪽끝이 막힌 갈대로 단소처럼 불어 소리내는 기준음관을 만들고 그것을 표준으로 다른 음률을 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궁중악단에서 기준음악기로 되는 편경을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돌을 찾아 전국각지를 편답하였는데 끝내 남양의 돌을 가지고 새로 만든 음관에 기초하여 매 음률을 따로 낼수 있는 악기제작을 주도할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발명이였다.

자기할바를 끝낸 박연이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는데 그가 여생을 보낸 집근처에 란초가 많았다고 하여 후세사람들은 그를 란계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는것이다.

《···시골에 내려간 박연이 늘 자손들에게 외운 소리가 고조선의 려옥이 창작한 공후인에 대한 이야기였소. 고대가요인 공후인이 이웃들뿐아니라 온 나라에 급속히 퍼지고 나중엔 고대중국의 한나라에 넘어가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을 녀인들과 상인들, 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불리워졌은즉 이게 나라의 문명이고 자랑이라는거요. 박연이가 이런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들려준데는 력사를, 한마디로 민족을 우선시하는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보오.》

총서 불멸의 향도 군가뢰성 3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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